이제 하나씩 정리해보겠습니다. ‘생각하는 나’는 착각입니다. 생각은 자동적입니다. 마치 팝콘처럼 마음속에 제 멋대로 튀어오르죠. 문제는 그러한 생각이 상징적인 효과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생각만으로도 이미 없어진 과거는 지금 이 순간의 우울이 될 수 있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도 지금 이 순간의 불안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레몬을 상상하면 입에 침이 가득 고이는 것과 같죠. 그런 생각과 거리가 가까울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각은 ‘나’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레몬맛 팝콘에 매달릴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시냇물 옆에 앉아 떠내려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듯 생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라고 믿지 않으면서 말이죠. 물론 우리가 실제 마주하는 건 그보다 더 복잡합니다. 애초에 생각은 감정, 감각, 충동 등과 엮여서 ‘꾸러미’처럼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서 바라보기 힘든 생각을 마주할 때는 우선 꾸러미를 ‘알아차리고’, 이를 개별적인 요소로 ‘분리’해야 합니다. 상황, 생각, 감정, 감각, 행동/충동으로 나눠서 분리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분리하여 보면 내가 겪는 심리적인 괴로움은 그저 각 심리적 사건들의 집합체인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이 ‘나’가 아니라 그저 마음속에 떠오르는 임의적인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애초에 생각이 부정확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종종 부족한 근거로 섣부른 판단을 내려 결론을 내리곤 하죠. 생각은 편향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은 긍정적인 사건보다는 부정적인 사건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은 ‘나’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기도 합니다.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나의 책임감을 강하게 부여하기도 하고, 나의 의미를 실제보다 더 크게 부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생각은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속에 특정한 생각이 떠오르면 정신없이 달려가 그것에 반응하곤 합니다. 이는 애초에 마음에게는 문제 해결적인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문제점을 찾아내 그것을 해결하여 통제감을 얻고자 하는 강력한 본능이 있습니다. 이 방법은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기가 막히게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문제 해결적인 본능을 우리 내면에 적용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애초에 마음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말끔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불가피합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힘들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울, 불안, 후회, 분노, 짜증, 권태, 회의, 자책, 죄책, 수치스러움. 이런 감정들이 우리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회피할수록 강해질 뿐입니다. 없애고, 제거하고, 대체하려고 할수록 그 대상의 중요성은 더 자주 각인됩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에 매달리다가 삶에서 다른 중요한 것에 신경 쓸 기회도 놓치고 맙니다. 텅 빈 마음을 만들기는 불가능합니다. 맑고, 깨끗하며,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면을 가득 채울 순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이상향을 좇지 않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들을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경험하고자 하면 괴롭지 않을 순 있습니다.
기꺼이 경험한다는 것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애초에 마음이 평가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본격적으로 불을 지피는 건 우리의 반응입니다. 하지만 평가하지 않고 내면을 바라보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심리적 사건일 뿐입니다. 심지어는 감각도, 감정도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종종 머릿속에서 만들어둔 회로를 따라 끊임없이 질주하곤 합니다. 생각을 곱씹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언가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저 레몬맛 팝콘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습관은 기꺼이 경험하기를 더욱 어렵게 합니다.
유달리 기꺼이 경험하기 힘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어릴 적 받은 상처, 초라한 내면, 연약한 자존감. ‘나’ 자체가 이런 사람인데 그것을 기꺼이 경험한들 무엇이 바뀌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더 깊은 수준까지 들어가 디스턴싱을 적용해 보면 결국 내가 자아라고 믿고 왔던 나의 기억, 특성,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대답은 모두 우리가 스스로 부여한 개념적인 틀에 불과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굳은 믿음조차 하나의 심리적 사건일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는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을 이해한 순간부터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없더라도 자유는 가능합니다.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인 가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선택은 다른 사람 혹은 사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나의 선택일 뿐입니다. 그 선택에는 그 어떠한 목적지나 목표도 없습니다. 그저 매순간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치에 따라 선택하여 행동할 때에도 역시나 중요한 건 생각은 하나의 심리적 사건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행동은 생각이 아니라 ‘나’가 하는 것입니다. 가치에 따른 선택과 마음속에 떠오른 심리적 사건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해 나갈 수 있습니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씩 단계적으로 선택을 이어 나가며 행동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이때 가치에 따른 행동은 유희적 쾌락을 좇는 회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다가올 이상향을 위해 이 악물고 인내하는 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든 알아차림과 선택들은 모두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지금 여기’에서 내가 그 모든 것들을 관찰하고 선택한다는 사실뿐입니다. 나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는 그 모든 심리적 사건을 담아내고 기꺼이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지금 이 순간 나의 가치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삶은 매순간에 있습니다.
모든 내용을 마음에 담아두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제 다음 한 문장만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생각과 거리 두고, 기꺼이 경험하며, 가치로 나아가기”
이제는 이 한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이해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부디 충만하고 평온한 현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