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원리, 수용
No.
19

나의 이야기는 '나'가 아니다

이제 조금 더 깊은 수준의 디스턴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정체성과도 같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커왔고, 성장 과정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렇게 삶을 겪어온 나는 어떤 사람인지. 단 몇 문장이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종종 우리에게 과도하게 경직된 틀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을 그 틀 속에서만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 보니 그 틀에 맞지 않는 정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무시되고 등한시됩니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외향적이고 싶을 때조차 내향적으로 행동하곤 합니다. 때때로 드러나는 자신의 외향적인 모습은 ‘나’답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이처럼 단 몇 문장으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는 건 인간의 본능입니다. 사람들이 각종 심리테스트, MBTI, 혈액형별 성격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을 바라볼 때 몇몇 특성들을 묶어 하나의 그룹으로 정의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더 효율적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인지 용량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능력은 자기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경험을 했고 그래서 이런 모습을 가진 사람이야.” 이처럼 자신에게 특정한 이야기를 부여하고 그 틀 속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을 자기개념화, 조금 더 간단하게는 ‘개념화’ 생각함정이라고 합니다.  

개념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선 개념화는 아주 편협한 시선으로 이 세상을 해석하도록 만듭니다. 개념화에 빠져있으면 그에 부합하는 정보만 우리 뇌에 도달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모두 철저하게 무시됩니다. 스스로가 부여한 정체성에 집착하게 되죠. 가장 흔한 예시는 특정한 정신질환의 진단명으로 개념화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울증 환자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팝콘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따라붙습니다. ‘우울증 환자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시죠?’ 그들은 우울증 환자도 아주 다양한 삶의 모습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는 우울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밝고 쾌활하며 호기심 넘치는 모습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한편 자기 자신을 어떠한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 개념화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에서 잘 역할하고 좋은 성과를 이뤄내는 순간에도 그것을 평가절하해버립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 반대로 자신이 부족하다는 정보는 아주 쉽게 받아들입니다. 작은 실수에 “그래. 역시 난 부족한 사람이었지”라고 생각하곤 하죠. 결국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의 심리적 사건이 아닌 그렇듯한 사실로 다가옵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 중 스스로가 부여한 개념화에 어울리는 것들만 취사선택하게 됩니다. 거리두기는 요원해지고 삶의 레퍼토리는 한없이 협소해집니다.  

개념화가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 행동, 감정에 아주 그럴듯한 정당화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설명합니다. “저는 어릴 적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보며 자랐어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팝콘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따라붙습니다. ‘그러니 제가 지금 왜 이러는지 아시겠죠?’ 물론 힘든 일이 우리를 괴롭혔던 건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정신건강 문제를 겪으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든 그런 힘든 일을 겪었다면 충분히 힘든 시기를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상황은 나의 탓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이야기로 스스로를 개념화하다 보면 변화의 동력을 잃고 점차 삶의 레퍼토리를 좁혀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왜 우리가 불안하고 우울하며 무기력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합당한 이유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생각과 감정에 아주 착 달라붙어 있게 만듭니다. 개념화된 이야기들이 뒷받침되었을 때 지금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하나의 심리적 사건이 아니라 자아 그 자체로 느껴집니다. 거리두기는 요원해지고 생각은 심리적 사건이 아니라 ‘나’ 그 자체가 됩니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진로 선택의 과정에서 부모님과 트러블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나에게 원하는 바가 있었으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종종 싸우곤 했다. 심적으로 고생하던 나는 병원에서 ADHD 진단을 받았다. ADHD를 진단받았으니 다른 일들에도 집중 못 하는 건 당연하다.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어릴 때 내가 하고 싶은 바를 했었더라면 ADHD도 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됐으면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난 ADHD야"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며 다른 일에 집중하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변화를 피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 중 “난 ADHD야”라는 틀에 맞는 생각들은 아주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그것과 부합하지 않는 생각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차단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 적 오랜 시간 부모님과 사이가 틀어졌다.” 이런 개념화에 갇혀있게 되면 당연히 부모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변화는 피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떠오른 개념화는 변화를 억압합니다. 지금 상황,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대한 이유를 제공하고 합리화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죠. 개념화된 이야기들에 사로잡힌 경우에는 평생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울과 불안의 늪에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결국 쳇바퀴처럼 돌고 있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우울해”, “그건 이것 때문이지. 나는 이런 경험을 했고, 이런 사람이야”, “이걸 바꿀 순 없는 걸”, “우울해.”  

개념화의 마지막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거리를 두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오며 경험한 것들과 그에 대한 자전적인 정보들은 정말로 ‘나’ 자신 같습니다. 이는 단순히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인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 사람 짜증나...” 조금 연습하다 보면 이 생각은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 내 마음속에는 지금 저 사람이 짜증난다는 생각이 떠올랐구나.” 짜증을 느끼더라도 그것에 매달리며 정신적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순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뭐... 나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냥 좋게 말해야겠다.” 하지만 개념화된 이야기들은 다릅니다. 이 이야기들은 정말로 ‘나’가 누구인가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나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왕따를 당한 적이 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늘 연애에 실패했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들은 정말로 ‘나’ 자신 같아서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착각입니다. 그런 기억이나 사건들이 ‘나’가 될 순 없습니다. ‘홍승주’라는 이름은 그저 그렇게 이야기로 한 문자 세 글자에 불과합니다. 저는 홍승주이지만, 홍승주라는 단어가 ‘나’는 아닙니다. 그것은 임의적인 관계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부여하고 있는 어떤 경험, 기억, 특성은 임의적인 관계에 불과합니다. 시인 김춘수는 다음과 같은 시 구절을 적은 바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것에 개념화를 하기 전에는 그것은 다만 스쳐가는 심리적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것에 개념화를 했을 때 그것은 나에게로 와서 썩은 꽃이 되었다.”

개념화가 항상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비교적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성적이다”라는 표현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제가 이성적이라고 해도 항상, 어디서나, 변함없이 이성적이진 않습니다. 때론 아주 비이성적인 결정을 하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감성에 마음이 동해 어떤 선택을 내리기도 합니다. 비슷하게 “나는 부족하다”라는 표현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이라도 늘, 언제나, 어디서나, 변함없이, 항상 부족한 건 아닙니다. 부족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보다 복잡합니다. 개념화된 몇 문장, 개념화된 몇 가지 기억들은 결코 ‘나’에 대한 진실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나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유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는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그걸 경험해봤어?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당신은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 못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까운 일들을 부정하고자 함은 결코 아닙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하죠. 어떻게 세상이 확 뒤집어져서 좋고 아름다운 일들만 남을 수 없나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요점은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경험들로 인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개념화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제한하고, 변화를 억압하고, 삶을 갉아먹는지 고려해 보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찬찬히 확대해 보면 결국 그런 이야기조차 우리가 아주 강하게 융합되어 있는 심리적 사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가 아니듯, 나의 이야기는 ‘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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