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원리, 수용
No.
15

원래부터 좋고 나쁜 것은 없다

‘억지로 마주하기’가 아니라 ‘기꺼이 경험하기’입니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개념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험하려고 해도 괴로워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기꺼이 경험하기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재밌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어떤 순간에는 생각의 강에 아주 크고 무거운 나뭇잎이 떠내려오는 것만 같아요.”  
“제가 올라탄 컨테이너벨트는 100km/h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만 같아요.”  
“구름이 그저 스쳐지나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들판에 누워서 바라보겠어요. 하지만 어떤 날은 구름이 아주 강한 빗줄기를 흘려보낸답니다. 번개도 쳐요.”

잘 이해합니다. 그리 간단한 일이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았을 테지요. 기꺼이 경험하기를 조금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강렬한 반응 그 자체를 조금 더 다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계에서 제법 유명한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한 수도승이 사찰에서 명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승은 명상이 좋았습니다. 고요한 사찰에서 내면을 관찰하며 알아차림을 수행하는 일은 그에게 큰 성취감을 안겨주었습니 다. 하지만 때론 마음처럼 되지 않는 날도 있었습니다. 사찰 근처에 찾아온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이야기할 때면 이내 집중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수도승은 이것이 매우 불만족스러웠습니다. 출가하여 조용한 사찰 속에서 수양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굳이 깊은 산속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우며 주의를 깨트리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화가 난 수도승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명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 훼방꾼이 찾아왔습니다. 여우의 울음소리, 뱀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는 소리, 정신없이 지저귀는 새소리까지. 자신의 주의를 흐트리는 대상을 만날 때마다 수도승은 좌절합니다. 그러다가 수도승은 묘안을 떠올립니다.  
“호수로 가자. 큰 호수의 정중앙에서 수련을 하면 나를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렇게 수도승은 배를 띄우고 호수의 정중앙으로 가 명상을 시작합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도, 동물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만족했습니다. 그렇게 제법 오래 수련을 이어나가던 중 어느 날, 명상을 하고 있던 수도승은 건너편에서 다른 배가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수도승은 소리칩니다. “위험합니다. 방향을 바꾸세요. 부딪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는 자꾸 다가옵니다. 수도승은 뱃사공에게 계속 경고했지만 결국 배는 수도승의 배와 충돌하고 맙니다. 호수에 빠져버린 수도승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밉니다. 그는 자신과 충돌했던 배에 올라가 소리지릅니다.  
“대체 어디 눈을 두고 배를 조종하고 있는 겁니까?”  
하지만 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호수를 떠돌던 빈 배가 바람을 타고 와 부딪혔던 것일 뿐입니다. 수도승의 분노는 순식간에 허망함으로 바뀝니다. 애초에 분노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도승은 생각합니다.  
“빈 배였다. 내가 그토록 분노하고 있었던 건 사람도, 동물도, 뱃사공도 아니었다.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이 분노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 모든 방해꾼들은 빈 배였다. 나는 빈 배를 향해 소리질렀을 뿐이다. 나의 반응이 없었더라면...”  

원래부터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나의 반응이 그렇게 만들 뿐입니다. 인류는 진화 과정을 통해 감정 체계를 극대화했습니다. 감정은 우리에게 위험을 알려주고, 동력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화의 부산물은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그 모든 심리적 사건들에 강력한 ‘평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아. 이것은 나빠. 나쁜 것을 마주할 때 우리의 감정은 강렬하게 반응합니다. 감정은 강렬한 신체 감각을 유발합니다.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없애야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정확히 고통을 괴로움으로 만듭니다. 괴로움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가치 판단입니다. 우리의 반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과 가치 판단을 쉽게 헷갈려합니다. 이처럼 가치 판단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는 것을 ‘평가’ 생각함정이라고 합니다.  

여기 나무로 만든 의자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 의자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잘라보면 되지요. 그래도 못 믿겠다면 가루로 만들어서 원심분리기를 돌리면 됩니다. 그 성분을 확인하면 됩니다. 의자의 ‘목재성’은 의자에 내재된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이 의자는 형편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형편없다’는 가치 판단은 이 의자의 특성인가요? 이 의자의 내재된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형편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가치 판단일 뿐이지요.  

많은 괴로움, 특히 스스로를 향하는 어떤 생각들 때문에 발생하는 괴로움은 주로 사실과 가치 판단을 혼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나는 형편없다”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를 순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고 그것이 ‘나’ 자체에 내재된 속성이자 사실인 건 아닙니다. 내가 정말로 형편없는 것은 아닙니다. ‘형편없다’는 건 나의 몸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형편없다’는 수식어는 나의 내재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마음이 만들어낸 평가인 것이지요. 가치 판단입니다. 이 평가는 마치 레몬이 침샘에서 침을 분비시키는 것처럼 아주 강력한 상징적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평가라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면 평가는 그 상징적 효과를 잃어갑니다. 생생해 보였던 레몬도 실은 빈 껍데기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형편없는 게 아니라, 나의 마음속에 “형편없다”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내가 그것을 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반응했을 뿐입니다. “나는 형편없다”라는 생각과 “‘나는 형편없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랐구나”라는 생각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어떤 괴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으로부터 사실과 평가적인 요소를 분리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평가’ 생각함정은 우리로 하여금 부정적인 감정과 신체 감각에 속수무책이 되도록 합니다. “불안해. 참을 수 없어. 미칠 것 같아. 끔찍해.” 마음속에 불안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감정 자체가 거짓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것이 참을 수 없고, 미칠 것 같고, 끔찍한 것은 나의 강력한 반응일 뿐입니다. 만약 이러한 감정들조차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그것조차 거리를 두고 기꺼이 경험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한다면 그 감정은 빠르게 힘을 잃어갑니다. 감정의 자양분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평가적인 태도입니다. 신체 감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급진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명제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신체 감각이 주는 괴로움의 자양분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평가적인 태도입니다.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피어오른다고, 어떤 감각이 느껴진다고 그것이 ‘나’ 자체에 내재된 속성이자 사실인 건 아닙니다.

생각은 '나'가 아닙니다. 곧 더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이는 '감정'과 '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가가 그것을 더 강력한 실제로 만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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