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원리, 수용
No.
14

기꺼이 경험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다

텅 빈 마음은 목표가 아닙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회피할수록 더 강해집니다. 긍정적인 것으로 가득 채우려 하고 할수록 부정적인 것들만 더 부각될 뿐입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생각은 더 활기차게 피어납니다. 이 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논리 전개를 보아하니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네요. 네, 맞습니다. 마주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주한다’는 용어는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야, 마음 별거 없다? 정신 단단히 먹고 이겨내면 되는 거야.”
“일단 부딪혀 봐야 해. 불안감? 그것도 막상 부딪혀 보면 별거 아니다?”
“너가 왜 우울한지 알아? 안 바빠서 그렇거든. 세상 힘든 거 다 마주하고 경험해보면 우울할 틈도 없어.”

새겨들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설명도 있습니다. 불안장애, 특히 특정공포증(specific phobia)과 같이 특정한 대상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질환을 치료할 때에는 체계적 둔감화(systematic desensitization)라는 행동치료 요법이 흔히 사용됩니다. 체계적 둔감화는 불안감을 느끼는 대상에 대해 단계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거미를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처음에는 거미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다음에는 거미 동영상을, 그다음에는 거미 인형을, 그다음에는 거미 모형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실제 거미에 노출시켜 불안감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방법입니다. 문자 그대로 체계적으로 ‘둔감’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마주한다’는 것은 자주 노출시켜 둔감하게 만들자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억지로 마주하기’보다는 ‘기꺼이 경험’해야 합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전자는 본질적으로 마음속에 특정한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후자는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든 자동적으로 떠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전자는 싫지만 어떻게든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후자는 그것조차 하나의 심리적 사건일 뿐이며 애써 회피하려고 할 필요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전자는 마음속에 떠오른 어떤 생각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후자는 마음속에 떠오른 고통이 나의 반응 없이는 실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기꺼이 경험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고통은 기꺼이 경험하지 않으면 괴로움으로 변형됩니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회피할수록 강해진다. 텅 빈 마음은 목표가 아니다. 이 세 명제를 잘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기꺼이 경험하기를 설명하는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늪에 빠졌습니다. 당신은 이내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어떡하지?” 발이 서서히 늪에 빨려 들어가면 패닉이 찾아옵니다. 당신은 늪에서 탈출하기 위해 허우적거립니다. 하지만 한쪽 다리를 들면 당신의 몸무게는 다른 한쪽 다리에 온전히 가해지게 됩니다. 그 결과 당신은 늪에 더 빨려 들어갑니다. 더 큰 패닉이 찾아옵니다. 어떻게든 늪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다간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어떻게든 몸부림쳐 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한쪽으로 가중된 몸무게는 우리를 점점 더 늪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찾아온 불안감을 다스리려고 애쓰다가 공황을 마주합니다. 머릿속을 침투하는 생각들을 억지로 떨쳐내려고 할수록 그 강도와 빈도는 더 강해집니다. 초라한 자아를 과잉보상하기 위해 애써 과하게 노력할수록 우울감은 깊어져만 갑니다. 사랑을 갈구하려고 할수록 얄밉게도 상대는 멀어져만 갑니다. 삶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건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생각을 곱씹어보지만 나의 삶은 점점 더 우울하게 흘러갑니다.

자, 이제 늪에 빠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늪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미친 거 아니야?” 오, 아니요. 정말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최대한 온몸을 늪에 넓게 접촉시켜 몸무게를 분산시켜야 합니다. 물론 늪은 축축하고 끈적합니다. 그래도 서 있으면 무릎까지 빠지더라도 아직은 덜 위협적인데 온몸을 접촉시키자니 금방 늪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 외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와 같다면 어떻겠습니까? 생각을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조차 억지로 마주하지 않고 기꺼이 경험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생각과의 관계를 새로 맺기 위해서는 기꺼이 경험해야 합니다.

기꺼이 경험하기는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불안해. 아, 맞아. 디스턴싱에서 기꺼이 경험하라고 했지. 기꺼이 경험하면 불안이 사라질 거야.” 이는 기꺼이 경험하기로 포장된 회피입니다. 또한 기꺼이 경험하기는 어떤 상태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기꺼이 경험하기는 마음속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 상태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평온한 상태를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기꺼이 경험하기는 무언가를 고쳐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아, 나는 기꺼이 경험하지 않고 있구나. 이건 틀렸어. 기꺼이 경험해야지.” 이 말이 제법 혼란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목적을 가지고 판단하고 애쓰는 것은 ‘기꺼이 경험’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기꺼이 경험하기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물며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 생각, 감정, 감각, 충동을 그저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보며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리적 사건이라면 거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더위를 피하곤 하지만 그 온도를 우리 몸속에서 없애버리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음을 피하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 자체를 머릿속에서 없애버리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끔찍한 장면을 보기 싫지만 눈을 통해 들어오는 심상 자체를 제거하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우리의 뇌를 스쳤다 지나가는 하나의 심리적 경험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거부하려고 애쓰지 않고 기꺼이 경험하며 관찰해 보면, 수 년간 나를 괴롭혔던 생각조차 실은 빈 깡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꺼이 경험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재밌는 실험을 해보겠습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임해 보시길 바랍니다. 휴대폰을 꺼내 타이머를 켭니다. 자, 지금부터 가능한 오래 숨을 참아보겠습니다. 최대한 오랫동안 참으면 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참았는지 측정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 시작합니다. 숨 참기. 최대한 오랫동안. 잘 참았나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힘드셨을 테죠. 아마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갑자기 이걸 왜 시키는 거야?”, “이따 저녁 뭐 먹지?”, “아, 진짜 답답해.”, “이제 진짜 안 되겠어.”

좋습니다. 한 번만 더 해보겠습니다. 이번엔 완전히 다른 방법입니다. 이번에 숨을 참을 때에는 몸에서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지 최대한 자세히 관찰해보시길 바랍니다. 답답하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가슴이 답답한지, 코가 답답한지. 공기가 흐르지 않는 콧속은 어떤 느낌인지. 한계가 찾아올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조금 더 버텼을 때 느껴지는 목 안쪽부터 치밀어오르는 느낌은 어떤 식인지. 정말 이제 죽겠다 싶을 땐 어떤 느낌인지.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은 없을 테니 부디 호기심을 가지고 그 모든 걸 하나씩 최대한 자세히 관찰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휴대폰을 꺼내 타이머로 그 시간을 측정해보시길 바랍니다. 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숨 참기. 최대한 오랫동안. 그 느낌과 감각을 최대한 관찰해보면서. 좋습니다. 이번엔 어땠나요? 잘 진행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의 방식을 통해 숨을 더 오래 참습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기꺼이 경험하고자 했더니 분명 숨을 더 오래 참게 되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내면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건 막을 순 없겠지만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경험하고자 하면 괴롭지 않을 순 있습니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입니다.

‘기꺼이 경험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명제를 이해했다면 분리하기(Isolation) 연습도 한 단계 더 나아간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꾸러미로 떠오른 생각을 만났을 때 그것을 상황, 생각, 감정, 감각, 행동/충동으로 나누는 데에 급급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큰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심 그런 생각과 감정들이 너무 괴로워서 이를 당장 분리하여 떨쳐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회피할수록 강해질 뿐입니다. 기꺼이 경험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리하기를 통해 각각의 요소를 적을 때 그 내용을 최대한 자세히 적어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상대의 표정은 어땠는지, 공기는 어땠는지, 온도는 어땠는지,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불안한 감정이라는 건 대체 몸의 어디에서 어떤 느낌으로 느껴졌는지, 이 순간 나의 몸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머리는 어떤지, 목은 어떤지, 어깨는 어떤지, 심장의 박동은 어떤지,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떤 충동을 느끼고 있는지. 단순히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을 넘어 최대한 자신의 상태를 잘 관찰하여 적어보시길 바랍니다.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꾸러미는 어차피 몇 가지 요소로 분리될 심리적 사건들일 뿐입니다. 거부하려고 하지 말고 기꺼이 경험하며 관찰해보시길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기꺼이 경험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명제를 이해했다면 생각의 강/하늘/공장 연습도 한 단계 더 나아간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사실 명상을 할 때에는 흔히 호흡을 사용하곤 합니다. 호흡은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중요한 초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호흡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심상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호흡을 사용해보라고 설명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호흡 명상을 주의전환 기법처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명상 연습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주의를 전환하는 것이 아닙니다. “호흡에 집중하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피할 수 있어요.” 어라? 어디서 본 말 같지 않나요? 명상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건 회피에 불과합니다. 회피하려 할수록 강해질 뿐입니다. 결국 피하고자 했던 고통을 마주하고 고통은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속 공간감을 만들고 떠내려오는 생각을 마주할 때에는 그것을 거부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만나면 당황하지 말고 그런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신체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때 나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등을 잠시 찬찬히 관찰해본 후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와 강, 하늘, 컨테이너벨트를 바라보면 됩니다. 명상 막바지에 이르러 정신 없이 생각을 좇아가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곤 “아, 뭐야... 내내 생각만 따라갔네. 실패했어.”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기꺼이 경험하기는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어떤 상태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도, 무언가를 고쳐야 하는 것도 아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저 자신이 생각을 좇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마음속에 “실패했어”라는 생각이 또 떠올랐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위 과정을 돕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연습을 해보며 마무리하겠습니다. 괴롭거나 잊고 싶었던 생각, 감정, 기억 등을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잠시 눈을 감고 그것을 마음속에서 끄집어내 1m 앞 땅바닥에 놓아둔다고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 생각, 감정, 기억은 어떤 모습입니까? 색깔은 어떻습니까? 무게감은 어떤가요? 촉감은 어떻습니까? 그것을 보고 있는 나는 어떤가요? 호흡과 심장박동은 어떤가요? 어떤 생각이 떠올랐나요? 잠시 관찰해보시길 바랍니다. 무서워 보이지만 결국 몇 가지 요소들의 심리적 사건으로 구성된 빈 깡통일 뿐입니다. 관찰이 끝났다면 그것을 다시 마음속에 넣어두시길 바랍니다. 그대로 바닥에 놓아두고 가버리고 싶은 마음은 잘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피할 순 없습니다. 기꺼이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마음속에 그런 것이 있다는 걸 기꺼이 인정하고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고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용한다, 받아들인다, 나를 사랑한다. 모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기꺼이 경험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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