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원리, 수용
No.
12

회피할수록 강해진다

괴로움은 선택이라는 말은 특히 중요합니다.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괴롭지 않거나, 점점 더 괴롭거나. ‘점점 더’라는 말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괴롭지 않는 것의 반대말은 단순히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괴로움은 배가 됩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부정적인 생각을 외면하거나 없애려고 하면 그 생각은 오히려 점점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그 생각의 존재감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한 가지 재밌는 실험을 해 볼까요? 재밌는 실험이니 꼭 따라해 보시길 바랍니다. 잠시 위 그림을 감상해볼까요? 핑크색 코끼리입니다. 자, 이제 잠깐 30초 동안 눈을 감고 공상 시간을 가져볼 텐데요. 절대로 핑크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부드립니다. 정말로 떠올리지 않는 겁니다. 절대로 핑크색 코끼리를 떠올리면 안 됩니다. 핑크색 코끼리를 떠올리면 큰일 납니다. 한번 해볼까요? 30초 동안. 핑크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는 겁니다. 절대로요.

자, 어땠나요? 떠오르지 않았다고요? 그럴리가요. 제가 “자, 어땠나요?”라고 이야기하자마자 핑크색 코끼리는 우리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핑크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부터 하루 종일 핑크색 코끼리만 떠오릅니다. 핑크색 옷을 보아도 핑크색 코끼리, 그냥 코끼리를 보아도 핑크색 코끼리, 동물을 보아도 핑크색 코끼리, 심지어 그냥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핑크색 코끼리가 두둥실 떠다닙니다. 언젠가 가까운 지인에게 직접 이 작업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만난 그에게 핑크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고 이야기했죠. 만약 성공하면 제가 밥을 산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만만해 했습니다. 그런 장난에 넘어가지 않는다고요. 저녁 시간 즈음 우연히 마주친 그는 저를 붙잡고 이야기합니다.  
“성공했어.”  
“뭘요?”  
“핑크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았다고!”  
그의 뇌에게는 저를 보자마자 핑크색 코끼리가 생각날 정도로 핑크색 코끼리가 인상 깊었나 봅니다. 아마 그 전에 도 그의 마음속에 몇 번이고 핑크색 코끼리가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우리 뇌는 떠올려야 하는 것과 떠올리지 않아야 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저 팝콘 기계는 외부적인 정보에 반응해 팝콘을 마구마구 만들어낼 뿐입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교정하고, 제거하고, 외면하려는 시도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애초에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자동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제하거나 바꾸려고 애씁니다.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내적 경험은 끊임없이 되새김질됩니다. 설령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없애려는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하루 종일 우울과 불안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행복해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삶에서 우울과 불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져만 갑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의 의제는 우울과 불안을 없애는 것으로 점철됩니다.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내적 경험은 더 강해집니다. 이런, 마음속에 부정적인 내적 경험이 더 강해지고 있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울을 없앨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불안을 말끔히 도려낼 수 있을까요? 그럼요. 바꿔야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없앱시다. 그런 나쁜 생각은 하지도 맙시다. 우리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다는 건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더 올바르고 긍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채웁시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요? 악순환입니다. 그 끝은 아주 깊고 끝없는 심리적 괴로움의 소용돌이입니다. 삶의 전체를 낭비하게 될지도 모르는 소용돌이지요.

이처럼 부정적인 내적 경험은 회피하려고 할수록 더 강해집니다. 오히려 자주 상기되며 정신적인 흉터만 늘어날 뿐입니다. 공황장애에서 공황이 왜 발생하는지 아시나요? 안정적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통제력을 잃고 패닉에 빠져버리는 걸까요? 불안을 통제하려고 과하게 노력하는 것이 악순환 고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답답해”, “어, 왜 이러지?”, “가슴이 너무 답답한데”, “심장이 빨리 뛰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다가 큰일 나”, “쓰러지는 거 아닐까? 사람들이 쳐다볼 것 같아”, “두근거림을 멈춰야 해”, “여기서 나가야 해”, “어쩌지 통제를 잃어버리는 거 아닐까?”,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이러다가 실신하고 죽는 게 아닐까?”, “어떻게 해. 멈춰야 하는데”, “이러다간 정말 공황이 올 것 같아”, “그것만은 피해야 해.” 우리 머릿속에서 이 생각들은 번개처럼 전개되어 나갑니다. 불안을 없애려는 시도는 다시 불안감을 야기하고, 더 불안해진 나는 그 생각과 감각에 더 집중합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다가 공황이 발생합니다. 패닉 상태에 빠져버리죠.

PTSD나 강박사고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됩니다. 머릿속에서 침투적으로 찾아오는 기억이나 생각을 어떻게든 없애 보려고 하는 시도는 그것들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합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과 일반인 사이에 특정한 사고가 침투적으로 떠오르는 정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달랐던 건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든 떨쳐내고 없애려고 집중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회피하려고 할수록 부정적인 내적 경험은 더 힘을 얻기만 할 뿐입니다.

부정적인 내적 경험을 회피하려는 시도는 추가적으로 다른 문제도 불러일으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경험을 회피하고 강해지고 다시 회피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삶의 의제 자체가 “우울 줄이기”, “불안 줄이기”, “나쁜 생각 줄이기”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10년 넘게 우울증을 앓았던 사람들은 우울과의 심리적인 전쟁을 쉽사리 놓치지 못합니다. 그게 스스로의 인생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자아와도 같습니다. 나는 지난 10년 간 우울증과 싸워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놓쳐버렸죠. 소중한 인연들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가고 싶었던 여행도 제대로 간 적이 없었죠.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피아노 치기’는 어렴풋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열 번의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매번 ‘다음에 괜찮아지면’이라는 조건 속에서 의미를 잃어갔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고 피하려는 시도는 나에게 새로운 괴로움을 안겨준 것을 넘어, 삶을 허비하게 만들며 또 다른 괴로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그동안 난 뭘 한 걸까?” 그 다음은 어떻게 흘러가냐고요? “진짜 큰일이네. 이제 진짜 마음을 고쳐먹자. 새해부터는 부정적인 생각하지 말고, 나약한 마음 품지 말고, 진짜 새로운 사람이 되자. 생각을 고쳐 먹자. 나쁜 생각을 없애자.” 이런, 어디서 본 것 같은 이야기이지 않나요?

생각은 자동적입니다. 그 자동적인 생각들 중에는 우리가 원치 않는 것들도 많습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그런 순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통은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적인 마음의 본능에 이끌려 그것을 피하고, 교정하고, 제거하려는 순간부터 괴로움의 악순환은 시작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슬럼프, 누군가에게는 번아웃, 누군가에게는 10년 넘게 이어진 우울증,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달고 지내야 하는 공황장애. 어떤 형태든 괴로움의 악순환은 강해지기만 할 뿐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통제하고 없애고 제거하고 바꾸려는 시도는 많이 해보지 않았습니까? 아직 덜 해봤다면 조금 더 그 방법에 매달려 봐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도 있습니다. 회피할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길이지요. 디스턴싱, 즉, 거리두기를 통해 생각과의 관계를 다시 맺는 길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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