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흔들리는 시기를 보내고 있나요? 한 가지 비밀을 알려드릴게요. 중요한 이야기이니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착각입니다.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해보죠. '생각하는 나'는 착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지금 직접 의지를 가지고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는 것을 멈출 수도 있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모순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특정한 생각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마치 삶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 같죠. 따라서 매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행동에 큰 책임을 지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면 그 자체만 바라본다면 이는 아주 큰 착각입니다. ‘생각하는 나'는 착각입니다. 생각은 그저 마음속에 나타날 뿐입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심리적인 괴로움을 더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사고 실험을 해보겠습니다. 머릿속에서 짚신벌레를 떠올려보세요. 짚신벌레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그냥 물 속에서 헤엄치는 단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를 상상하시면 됩니다. 짚신벌레는 물 위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습니다. 이 방향으로 갔다, 저 방향으로 갔다, 활발히 움직이고 있네요. 이때 이 짚신벌레는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그렇다”,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럴 수도 있지. 짚신벌레가 되어봤어?” 만약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이 질문을 단순히 진위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사실로서 받아들여지는가, 그 정도를 묻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습니다. 자, 짚신벌레는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나요?
짚신벌레에게는 화학주성(chemotaxis)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특정한 화학 물질을 향해 이동하는 성질이 있다는 뜻입니다. 짚신벌레는 그저 특정한 화학 물질을 찾아 이동할 뿐입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짚신벌레가 물 위에서 어떤 경로로 이동할지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화학 물질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하여 짚신벌레가 어떤 방향으로 이동할지 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짚신벌레는 결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생명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짚신벌레 그 스스로가 어떻게 느낄지는 몰라도, 적어도 짚신벌레에 대한 그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짚신벌레는 그저 외부 자극에 따라 움직이는 생명체일 뿐입니다. “짚신벌레가 의지를 가지고 자유롭게 움직인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거의 사실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개미는 어떨까요? 개미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생명체인가요? 개미는 페로몬이라는 화학 물질을 사용하여 소통합니다. 페로몬을 따라 이동하기도 합니다. 개미가 페로몬을 따라 이동하는 방식은 짚신벌레의 경우보다는 훨씬 더 복잡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복잡한 계산을 통해 개미가 페로몬을 따라 이동하는 방식을 모델링했습니다. 그러한 모델링을 활용하면 우리는 개미가 어떻게 이동할지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어떻게 이동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개미 역시 외부 자극에 따라 움직이는 생명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강아지는 어떨까요? 아니, 우리 인간은 어떤가요?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명체일까요? 자, 다시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외계인이 있습니다. 이 외계인은 매우 진보한 생명체입니다. 우리가 짚신벌레에 대한 그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외계인은 우리 인간에 대한 그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전자에 대한 정보, 신경세포의 작용,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관계, 그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죠. 그렇다면 이 외계인이 보았을 때 인간이라는 종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명체일까요? 아니면 그저 외부 자극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 생명체일까요?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는 몰라도, 적어도 외계인 입장에서 인간은 그저 외부 자극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명체일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생각하는 나'는 착각일 뿐입니다.
사실 이 생각을 더 작은 요소로 환원해보면 더 명백합니다. 생각은 전두엽의 신경 발화로부터 만들어집니다. 심장 어딘가에 있는 영혼이 생각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생각은 전두엽의 신경 발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두엽의 신경 발화를 조절할 수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다시 전두엽의 신경이 발화되도록 선택한 것은 누구일까요? 그 의지는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요? 또 다른 전두엽의 신경 발화일까요? 이러한 설명은 끝없는 순환 논리일 뿐입니다. '나'라는 세계 속에서 태초의 시작을 찾는 것은 끝없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과학자들이 빅뱅 이전에 우주가 어떠했는지 논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신을 개입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상 태초의 자유로운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의도를 가진 의식에 근원을 두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나’는 착각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건 이 간단한 명제가 수많은 심리적 괴로움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 사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많은 심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생각하는 나’는 착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비로소 생각에 대한 생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마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30가지 명제를 하나씩 설명할 것입니다. 그 설명에는 그 어떠한 영적인 내용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의식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영혼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실용적인 이점을 주지 못한다는 점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입니다. 설령 그러한 영적인 탐구가 실용적인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관점을 우리 모두가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 저는 보다 일반적이고 쉬운, 그리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앞으로 설명할 명제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생각과 거리 두기'입니다. 보다 공식적인 표현으로는 '디스턴싱(Distancing)'입니다. 디스턴싱은 인지행동치료의 창시자인 Aaron T. Beck 박사가 처음 사용한 표현입니다. 디스턴싱은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매순간 나의 가치에 맞는 선택을 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디스턴싱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프로이트, 융, 아들러의 정신분석부터, 인지행동치료, 마음챙김기반인지치료, 수용전념치료와 같은 현대의 심리치료까지, 모든 심리치료는 궁극적으로 디스턴싱을 체득하는 과정입니다. 수천 년 동안 큰 깨달음으로 전파되어 왔던 명상, 불교 철학에서 석가모니의 메시지, 그리고 보다 과학적인 관점에서의 마인드풀니스 모두 디스턴싱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주요 자기계발 서적들은 디스턴싱의 비밀을 다룹니다. 삶을 헤쳐 나가며 큰 깨달음을 얻었던 인물들의 연설은 디스턴싱을 향하고 있습니다. 치료든, 종교든, 자기계발이든, 그 본질은 모두 디스턴싱으로 수렴합니다. 디스턴싱은 그 모든 비밀을 보다 대중적이고 쉬운 용어로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디스턴싱을 통해 생각과 다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어도 좋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니까요. 그 사실을 인지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