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동물: 우리는 왜 우울과 불안을 곱씹는 걸까?
2024-11-05
11/5/2024 5:10 PM

인간이 우울∙불안 반추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

홍승주 / CEO of Distancing

우리는 왜 이다지도 괴로운 걸까? “저는 원래 소심해서…” “저는 어렸을 때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글쎄요. 어쩌면 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자기 비난은 잠시 접어두고 조금 더 큰 시야를 가져보자. 전세계 사람들 중 30%는 일생 중 한 번 이상 진단 가능한 수준의 정신건강 문제를 앓는다. 80%는 한 가지 이상의 심각한 심리적 문제를 겪는다. 이 세상에 우리처럼 괴로운 종은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인간처럼 편안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생명체는 없다. 대한민국 신생아 사망률은 0.15%다. 새끼 바다거북은 어떤지 아는가? 알에서 부화한 후 바다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약 90% 이상이 천적에게 잡아먹히거나 다른 환경적 요인으로 죽는다. 바다에 도달한 10% 중에서도 성체까지 성장하는 개체는 극히 드물다. 바다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와 상어들이 가득하다. 당신이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다고 생각해 보라. 장담컨대 나는 공황발작에 빠져 모든 걸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거북이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세상은 온갖 종류의 스트레스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우울증을 겪지 않는가? 그들은 왜 만성 불안 따위를 앓지 않는가? 그들은 왜 PTSD로 인해 현실로부터 해리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반면에 그토록 안전한 우리는 왜 이렇게 괴로운가? 괴로움은 왜 이렇게 보편적인가? 아담의 원죄가 우리 뇌 깊은 곳에 박혀있는 걸까?

거북이가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다. 그들도 포식자를 만나면 호르몬이 분출되기 마련이다. 가슴은 뛰고, 동공은 커진다. 공포나 두려움은 그들로 하여금 주위를 더 잘 경계하도록 만든다. 거북이도 위험을 감지했을 때 신경계에서 스트레스 반응이 활성화된다. 그들의 '원초적인 뇌'는 어떤 신호를 특정한 가능성이라고 판단하면 결정을 내리고 신체가 이 결정에 따르도록 한다. 그들의 뇌는 포식자를 피하고, 경쟁자와 싸우고, 상대와 교미를 맺도록 자극한다. 그들의 뇌는 감정을 만들어내고, 감정은 동기를 지배하며, 동기는 행동을 유도한다. 물론 거북이가 그 감정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그들에게도 정확히 우리와 동일한 반응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거북이와 동일한 원초적인 뇌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자동차 경적음에 깜짝 놀란다. 어두운 골목길에 덩치가 큰 사람이 있으면 신경이 곤두선다. 운전 중 보행자가 뛰어들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움직인다. 우리도 즉각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 감정은 동기를 지배하고, 동기는 행동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우리는 거북이 그 이상의 존재다. 인간은 왜 지구의 정복자가 되었을까? 인간이라는 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은 ‘언어적 사고 능력’을 꼽는다. 인간은 머릿속으로 수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의 눈을 통해 세상을 제멋대로 조작할 수 있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보자. 눈앞에는 종이가 놓여있다. 새하얀 종이 위에는 티끌 같은 연필 자국이 있다. 종이 옆에는 지우개가 있다. 당신은 연필 자국을 지우길 원한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지우개로 연필 자국을 지우면 된다.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상상 속에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상상하고, 계획하고, 추론한다. 심지어는 문자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우리는 먹어보지 않아도, 만져보지 않아도, 심지어 직접 보지 않아도 ‘거북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괴롭다’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이러한 능력은 거북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 탁월한 능력을 통해 지구를 지배했다. 단순히 뇌가 큰 게 중요한 건 아니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뇌 용적이 더 컸다. 덩치도 더 컸다. 하지만 그들의 뇌는 시각과 신체 조절에 많은 자원을 할당하고 있었다. 반대로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문제 해결에 더 적합한 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정복자가 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즉, 진화는 ‘문제 해결의 뇌’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문제 해결의 뇌는 양날의 검이다. 똑똑해지는 것은 큰 부작용을 낳았다. 우리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문제 해결 능력을 더 높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불안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은 상징적 효과를 통해 또 다른 불안을 낳는다. 불안해지면 더 위협적인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위협적인 것을 예측하면 더 불안하다. 결국 악순환에 빠진다. 비슷하게 우리는 과거 또는 벌어진 일을 곱씹으며 우울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다. 생각은 상징적 효과를 통해 또 다른 우울감을 낳는다. 우울감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자기 반성적인 성찰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결국 악순환에 빠진다. ‘감정을 유발하는 생각’과 ‘생각을 유발하는 감정’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눈덩이처럼 커지는 식이다. 문제 해결의 뇌로 인해 우리는 외부 세계의 실제 요인보다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사건에 더 강하게 지배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지구의 정복자가 된, 그리고 동시에 지구의 가장 불행한 존재가 된 궁극적인 이유다. 우리는 척추동물(Vertebrate) 중 최고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반추하며(Rumination) 생각을 곱씹는 안타까운 반추동물(Ruminebrate)이다.

더 불행한 사건 중 하나는 문제 해결의 뇌가 우리에게 ‘자기 정체성’이라는 축복이자 저주를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정체성으로 인해 더 잘 적응하고, 더 잘 기능하며, 더 효과적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경직된 사고에 갇힌다. 우울의 틀에 갇히고, 불안의 틀에 갇히며, 무능의 틀에 갇힌다. 죄책감, 또는 수치심의 틀에 갇히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특정한 개념을 부여하며 그것의 제한된 틀 속에서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곤 한다. 이 틀은 우울과 불안, 그리고 어릴 적 트라우마를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원천이기도 하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그럴리가. 인간이 그렇게 대충 설계되었을 리가 없어.” 이는 진화의 작동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안타깝지만 진화는 그 어떤 것도 미리 설계할 수 없다. 자연은 어떤 한 시점에서 유전자의 전달에 이점이 있는 유전자를 선택할 뿐이다. 그 유전자가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고 한들, 그것은 자연의 관심사가 아니다. 공작새의 꼬리는 암컷을 유혹하는 데에 최적이다. 하지만 이는 공작새가 포식자로부터 도망치는 데에 최악의 조건으로 작용한다. 이미 한 방향으로 나아간 진화는 되돌릴 수도 없다. 아프리카의 초원에는 예전처럼 큰 나무들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린의 목이 짧아지는 건 아니다. 이는 불가피하고 비가역적인 타협이자 거래다.

이처럼 우리는 필연적으로 '문제 있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좁은 시야에서 보면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부족함 때문에 발생한 것 같겠지만, 사실 애초에 인간이란 그렇게 진화되어 왔을 뿐이다. 문제 있는 마음에 우리 개인의 잘못은 전혀 없다. 공작새의 꼬리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개인에게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린의 목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는 것처럼. 마음 문제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이 생명체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왜 그토록 괴로울 수밖에 없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면 우리는 우리의 반응을 자기 비난과 수치심 없이 바라볼 수 있기 마련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을 훈련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삶은 내가 스스로 이끌어가는 것이고, 내가 선택해 나갈 문제다. 그 누구도 나를 진정으로 책임질 순 없다. 갑자기 번개가 쳐서 삶이라는 당신의 곳간을 파괴하였는가?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수리할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그 책임은 누구도 대신 해 줄 순 없다.

반가운 소식이 있다. 곳간을 효과적으로 수리할 수 있는 뛰어난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반추동물들만이 가진 축복이기도 하다. 자기 정체성이 진정으로 자신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는 것. 자아를 가지고 있음에도 ‘나’라는 느낌은 착각이며, 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 감정, 감각을 그저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보고 기꺼이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이 ‘자각할 수 있음’의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면서 동시에 반추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또 하나의 진화론이기도 하다. 찰스 다윈은 약 200년 전에 인간이 원숭이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제는 진화론의 그 다음 통찰을 받아들일 시기다. ‘나’는 착각이다. ‘나’라는 느낌은 그저 느낌일 뿐이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나’는 큰 착각이다. 인간도 결국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어떤 자유로운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히 고고한 게 아니다. 이는 우리의 지독한 착각이자, 수많은 심리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통찰은 끊임없는 우울과 불안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있어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우리는 그 통찰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연습하는 과정을 ‘디스턴싱(Distancing)’, 즉, ‘거리두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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