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친구 중 하나로부터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쭈뼛쭈뼛거리며 말하는 게 꼭 할 말이 있는데 무언가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이럴 땐 외려 내 쪽에서 대범하게 나가야 상대가 더 마음 편하다.
"아오, 야. 그냥 말해. 뭔데. 사람이라도 죽였냐? 계엄이라도 선언했니? 꼴깝 떨지 말고 말해."
이야기는 이랬다.
그는 현재 응급실이었다. 가슴이 빨리 뛰고 현기증이 나면서 쓰러질 것 같아 응급실로 갔다고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 달 전에도 비슷한 증상이 있었다. 샤워를 하다가 손발이 저릿한 느낌을 느꼈고, 현기증이 나더니, 갑자기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고 나니 가슴이 빨리 뛰었고, 이에 "이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심장에 문제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서는 심전도와 피검사를 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고 한다. 심전도도 정상이었고, 혈액검사에 이상도 없다고 했다. 이후 동네에 있는 내과에 방문하였고, 내과에서는 "심전도라는 게 원래 문제가 있었던 당시가 아니면 이상이 있다고 뜨지 않는다"라는 불안한 설명만 들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비슷한 증상을 경험하고 응급실로 달려간 뒤 의사를 기다리며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병원 밖에 나와있는 내게 연락했나 싶어 안쓰럽기도 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부정맥, 또는 공황장애. 부정맥 중에는 실신할 것 같은 느낌과 현기증과 같은 '이상감각'이 동반되는 유형도 있다. 아마 그래서 내과 선생님도 쉽사리 '심장 문제가 아니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아무리 이야기를 깊게 나눠봐도 심장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친구가 공황 발작을 경험할 그럴 이유도 전혀 없었다. 최근 스트레스 받는 일도 전혀 없다고 했고, 올 봄에 진행될 결혼은 착실히 잘 준비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소위 '신의 직장'이라는 곳에서 근무하며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던 그에게는 회사 스트레스도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 친구가 '신체 감각에 대한 과도한 집중'을 했다는 부분이다. 나는 친구에게 당시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하나씩 묘사해 보라고 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악순환 고리가 드러났다. 무언가 이상한 감각을 느낌(예: 현기증, 손발이 저릿함) → 신경이 쓰임(예: "어, 또 이러네?" → 감각에 더 집중함 → 더 신경이 쓰임(예: "진짜 몸에 문제 있는 거 아냐? 심장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 불안함. 결국 이 악순환이 머릿속에서 아주 빠르게 돌면서 공황이 발생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의 공황은 대체 왜 형성된 걸까? 삶이 불안해서? 인생이 고단해서? 그렇지 않다. 꼭 심리적인 이유를 찾지 않아도 공황의 매커니즘만 잘 이해하면 그의 반응은 충분히 잘 설명할 수 있다. 조금 더 이야기를 캐보니 다음과 같았다. 1-2년 전 즈음, 장염을 아주 심하게 알았던 적이 있었다. 구토와 설사를 반복적으로 한 그는 화장실에서 일어서는데 순간 현기증이 나면서(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 일시적으로 발생한 기립성 저혈압일 것이다) 손발이 저릿저릿했다고 한다(구토와 설사로 인한 체내 전해질 불균형 때문에 발생한 이상감각일 것이다). 그리곤 실신하듯이 바닥으로 쓰러졌는데, 그는 그때 처음으로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하고 무서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장염을 깨끗이 나았고,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무의식 중에 그 불편한 감각을 기억한 게 틀림없다. 아마 이번에 샤워를 할 때에는 다른 이유 때문에 현기증을 느꼈을 것이다. 뜨거운 물을 너무 오래 쐬고 있었거나, 그냥 몸의 일시적인 이상 반응이거나, 샤워하면서 노래를 너무 열심히 불렀거나. 이유는 조금 더 찾아봐야 할 것이다. 허나 일단 현기증을 느끼는 순간, 그의 몸은 과거의 경험을 떠올린다. 기억은 감정을 유발하고, 감정은 생각을 동반한다. "죽는 거 아냐?" 감정은 다시 감각에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들고, 감각은 다시 감정을 부각시킨다. 감정은 다시 감각을, 감각은 다시 감정을. 이 양성 피드백이 머릿속에서 몇 번만 사이클을 돌면 불안감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공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꼭 인생이 막막해야 공황이 발생하는 건 아니다. 마음이 나약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공황이 왜 발생하는지 그 매커니즘 잘 이해하면 그에게 '난데없이' 나타난 공황도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내 설명은 들은 그는 마치 구원 받은 신자 같았다. "맞아." 그랬어!" "진짜 그랬었어." "생각해 보니 장염 때 그 현기증이나 손발 저릿함이랑 똑같은 느낌이야." 나는 그에게 간단한 행동 요법들을 알려주고, 정신과든 가정의학과든 방문하여 가벼운 신경안정제를 먹어본 후 증상이 약해지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러곤 이후 며칠 뒤 다시 연락이 왔다. 응급실 검사는 역시나 모두 정상이었고, 신경안정제를 먹었더니 증상이 약해졌다고. 공황이었다.
그 친구를 보며 두 가지를 느꼈다. 첫 번째는 정신건강 문제는 정말로 쉽게 말하기 힘든 주제라는 것이다. 그는 내 인생 절반 이상을 같이 알고 지내온 친구다. 내가 어떤 나쁜 짓을 했을 때 솔직하게 고해성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조차 나에게 정신건강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망설였다. 부끄러워하고, 무언가 약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에게 내가 불면증을 경험했던 적, 불안감을 느꼈던 적을 들려줬다. 그러니 그는 안도하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정신건강은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풀어야 하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는 정신건강 문제에서, 특히 우울과 공황 같은 일종의 '생활형 정신건강' 문제에서는 매커니즘의 이해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지 못하면 쉽게 대처하지 못한다. 그 친구가 그러다가 그냥 공황장애로 진단 받고, "왜 그런 걸까요, 선생님?"이라는 질문에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죠. 공황장애 생각보다 흔해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약 잘 챙겨드세요."라는 말만 들었다면 어땠을까? 신경안정제를 통해 난데없이 찾아오는 증상만 억누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약 없이는 불안해서 회의를 참여할 수 없는 캄캄한 정신질환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 되진 않았을까? 그는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잘 이해한 것만으로도 불안감이 크게 해소된 듯 보였다. 그 이해에 기반해 공황 전후로 해야 할 것들을 설명해 주니 훨씬 더 통제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와 디스턴싱 팀이 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이 문제를 중요한 화두로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리고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심리적인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사람들에게 교육하는 것. 이 두 가지 나와 디스턴싱 팀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비전, 그리고 가장 큰 사업적 기회일 것이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거기에 풀어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와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홍승주, M.D.
CEO at Orwell Heal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