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주 / CEO of Distancing
수능, 결전의 날이다.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능'이라는 단어에 많은 애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독한 학벌주의 사회라서 그런 걸까. 수능이 다가오면 저마다 못다 이룬 꿈에 대한 아쉬움, 회환, 자기반성, 심지어는 한없이 낮아지는 자존감까지, 많은 감정들을 떠올린다. 어쩌면 수능의 결과가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게 강력한 개념화로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개념화는 중요한 생각함정 중 하나로 어떤 틀을 부여하고 그에 맞춰 자신 또는 세상을 해석하려는 인지적 편향을 뜻한다).
고고한 척 뒷짐지고 "그거 별거 아니야"라고 훈계할 생각은 추후도 없다. 나도 비슷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20살 때 지방에 있는 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음악을 제외하면 삶에 그다지 그렇게 관심 있는 일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공부에 대한 동기도 별로 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것 치고는 곧잘 따라갔기에 나도, 부모님도 나름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보란듯이 미끄러졌고, 나는 크게 실망했다. 삶이 실패한 것 같았고, 왜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지 한스러웠고, 앞으로 나는 딱 그 정도의 삶을 살 것만 같았다.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군입대 후 이것저것 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주제를 찾았고,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누군가 선물한 '인간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을 계기로 철학, 사회과학, 진화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각이 더 확장되어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결국엔 운이 좋게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기에 이르렀다. 수능을 망치고 인생이 망할 것 같다는 어린 생각을 했던 것으로부터 5년 정도가 지났을 즈음이다.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정말 많다. 인생이 늘 잘 풀릴 순 없다. 고난과 시련은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순간에 사로잡혀 일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보낼지, 아니면 다시 한번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하려고 노력하고, 그 가치에 전념하도록 할지는 스스로에게 달렸다. 서울의대를 졸업했음에도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나는 정말 많이 보았다. 실은 다른 삶을 원하지만 의대로 진학하여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몸과 마음이 다 피폐해진 친구, 여전히 눈 앞의 성취에만 몰두하며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하루하루를 불행하게 보내는 것 같았던 교수님. 공부가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보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명확히 하고, 그것에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였다면, 그리고 감사하게도 수능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너무나도 다행이다. 그것이 공부였지만, 아쉽게도 수능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다음 기회를 모색하면 된다. 다음 기회는 또 다른 수능일 수도, 삶에서 다른 기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공부가 아니었다면 또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된다. 나는 '그것이 공부가 아닌 사람'이었지만 어느 지점에서 다시 공부가 중요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 뿐이다.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생은 매순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삶은 어떤 유전자에 쓰여있지도 않고, 타로에 적혀 있지도 않고, 점쟁이의 예언에 숨어 있지도 않다. 수능 결과에 그려져 있지도 않다. 내 짧은 인생 경험으로 보면, 그런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하여 그에 전념할 때, 삶은 늘 그에 보답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또한 기꺼이 마주하고 경험하려고 하며, 보다 주체적인 모습으로,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분명히 하여, 그에 전념하는 것. 내 개인적인 삶에서도, 뿌리 깊은 정신건강 문제를 이겨내고 삶의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볼 때에도, 나는 그 방향이 인생에 대한 가장 성숙한 태도이고, 가장 현명한 답이라고 믿는다.
* 혹 이 글을 읽는 수험생분들이 있다면, 고생 많으셨습니다. 결과와 무관하게 이제 또 삶의 다음 장으로 나아갈 시간이네요. 저는 수능의 결과가 안 좋았지만 또 현재는 더 좋은 결과를 만들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그럴 수 있다면 여러분들도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결과가 좋았다면 저보다 더 좋은 상황이니 더 잘 나아가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남은 인생의 더 긴 시간들은 보다 풍요롭고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보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