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디스턴싱을 전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선생님은 무기력한 날이 없나요?” “늘 그렇게 생각이나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행동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심리치료를 제공하는 사람들도 우울과 무기력한 날들을 보내기도 한다.
나는 정신건강 업계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상담사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그중 대부분은 자신이 삶의 어느 시기에 제법 큰 심리적인 괴로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다른 의사보다 자살률이 더 높지도 않은가. 어떤 절대적인 평온의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대부분 사기거나 정치적 포퓰리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인생은 고단한 것이고, 그 고단함을 인정할 때 삶에서는 어떤 행복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디스턴싱을 만든 나조차 제법 힘든 시기를 보낼 때가 있다. 내게 2024년의 연말은 특히 그런 시기였다. 사업의 방향을 이리저리 조정하는 일도 있었고, 오래동안 함께 했던 팀원들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가족의 건강 문제로 정신 없었던 일도 있었고, 또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들로 마음을 쓰는 순간도 많았다.
그렇게 복잡한 일들이 자꾸 겹치다 보니 제법 지치는 순간이 찾아왔다. 무기력하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생각과 감정은 하나의 심리적 사건이고, 그것과 무관하게 선택하여 행동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그 일이 쉬운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감사하게도 큰 탈 없이 잘 추스릴 수 있었다. 힘든 시기를 무탈히 견디며 느낀 게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진정으로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생각, 감정과 별개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의 원동력이 될 만한 가치가 명확해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면 의욕과 희망은 조금씩 차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기력한 상황에 휩싸여버리면 미궁 속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조금 더 하향식 접근에서는, 가치를 먼저 다시 되새기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다. 나는 외부와 연락을 줄이고 내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장소에 가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는 시간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는 ‘기분보다 먼저 행동하기’다. 이는 상향식 접근에 가깝다. 즉, 일단 뭐든 하고 보는 것이다. 우울증에 효과적인 행동활성화(Behavioral activation)에서는 이를 매우 강조한다.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inside-out), 즉, 마음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기분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outside-in), 즉, 우선 행동을 하고 그것이 기분을 조성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사업을 하느라 줄였던 책을 몇 권 읽었고, 기타를 연습하기도 했다. 새로운 자극을 늘리기 위해 가급적이면 새로운 음식, 새로운 가게, 새로운 식당 등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 두 번째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는데, 끊임 없는 순환 논리에 빠진다는 것이다. “일단 몸을 움직여봐.” “하지만 그럴 의욕이 없는 걸?” “일단 움직여야지 의욕이 살아나는 거야.” “하지만 그 행동을 만들 의욕이 없다니까?”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보고 경험하는 연습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래야 생각, 감정과 별개로 행동을 먼저 실천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북극성으로 삼을 수 있는 잠언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것도 제법 도움이 된다. 디스턴싱의 명제들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디스턴싱의 명제에 포함되어 있진 않지만 나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제법 도움됐다. “마차를 말 앞에 맬 수는 없다.” 기분과 행동 중 무엇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면 당연히 행동이다. 지치고 힘들어 몸을 움직이기 싫은 순간에 “그래도… 마차를 말 앞에 맬 수는 없지 않나…”라고 속삭이며 뭐라도 하다 보면 기분이 뒤따라올 때가 있다. 그때부터는 올라온 기분을 따라 행동하면 된다.
매번 강조하지만 우울, 무기력, 불안 등 대부분의 정신건강 문제는 아주 강력한 악순환 고리 속에서 심화된다. 그 악순환 고리를 깨기 위해서는 늘 ‘나’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외부의 우연한 어떤 요인이 상황을 바꿔줄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 냉정한 말인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삶은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마음이 힘들어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창밖으로 바라보고 조용히 읊조려보자.
“그래도 마차를 말 앞에 맬 수는 없지 않는가…”
홍승주, M.D.
CEO at Orwell Heal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