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그동안의 이야기는 모두 이 명제를 가슴에 새기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중요하다.” 많은 명상 가이드들은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진정으로 무슨 뜻인지 이해하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마음속에 떠오른 팝콘과는 다른 선택들을 해나갈 수 있는지, 어떤 가치를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이러한 내용들이 이해되지 않고서는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라는 요청은 주의력 훈련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의력 훈련은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챙김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지요. 하지만 그 모든 심리적 괴로움들이 주의력 개선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지금 여기”라는 표현에는 보다 심오한 통찰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가 제법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꼭 논의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차근차근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생각은 자동적입니다. 팝콘처럼 튀어 오르죠. 심지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지금 눈앞에 없는 것들도 마음속에서는 생생한 실제로 경험될 수 있죠. 그러한 생각과 거리가 가까울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디스턴싱(Distancing), 즉 거리두기가 중요합니다. 생각을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꾸러미’로 떠오른 생각들을 개별적인 요소로 분리하기. 자동적인 생각들에서 생각 함정을 찾아내고 빠져나오기.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생각을 ‘나’가 아닌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 생각이라는 게 정말로 믿을 만한 건가?”, “생각이 이토록 자동적이고, 임의적이고, 정확하지 않고, 편향적이고, 과도한 책임을 지우며, 동시에 평가적이고, 개념화를 통해 시야를 제한하고, 특정한 생각의 홈 속에서 끝없이 달리는 반추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모두 곧이곧대로 믿고 반응하며 그것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디스턴싱의 중요한 깨달음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을 해볼 게 있습니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요? 진짜 믿을 수 있는 안전한 ‘나’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 모든 심리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경험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의식하고 있는 ‘나’입니다. 영적인 탐구를 할 때에는 이 ‘나’가 존재하는지, 아니면 ‘나’라는 것도 착각이며 결국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의 의식적 경험 그 자체인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의 경험’만이 유일하게 믿을 만하다는 것이지요. 과거에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가슴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고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심리적 사건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나’는 여전히 동일하게 존재했습니다. 이 경험적 의식은 개별적인 심리적 사건과는 무관합니다. 사실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정신적인 허상일지도 모릅니다. 매 순간을 경험하는 ‘나’와는 무관한 사건이니까요. 현재는 끝없이 변화하는 사건이며 순간순간 일어나는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변하지 않고 삶의 자취를 따라 연속적으로 이어져온 자아는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는 나’ 또는 ‘현재 시점에서의 경험적 의식 그 자체’입니다. 생각의 강에 앉아 있는 ‘나’, 강에서 떠내려오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경험 그 자체이지요.
디스턴싱의 후반부에서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가치는 선택이고, 방향입니다.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지요. 즉, 행동은 생각이 아니라 ‘나’가 하는 것입니다. 회피하지 않고, 억지로 버티지 않으며, 가치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이 선택 또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집니다. 과거의 틀에 얽매여 꼼짝 못한 상태에서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파랑새 같은 미래를 기다리며 억지로 버티며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나의 가치에 따라 그 방향으로 선택을 할 뿐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믿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선택은 지금 이 순간에서 나의 가치에 따른 선택입니다.
이처럼 가장 중요한 경험은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는 것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거리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가치에 맞게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경험에 대해 성숙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경험에 대해, 특히 현재의 부정적인 경험에 대해 다음 세 가지 중 한 가지 방식으로 반응하곤 합니다: 첫째, 멍해지거나 지루해지며 머릿속 어딘가로 달아나기; 둘째, 순간의 경험에 매달리고 곱씹기; 셋째, 순간의 경험을 없애거나 통제하거나 대체하려고 하기. 현재의 경험 그 자체를 수용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과거와 미래 속에서 투쟁하는 것이지요.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대체 우리나라로 왜 여행을 오는 걸까?”와 같이 생각합니다. 이 뻔하고 지루한 곳에서 뭐 그리 볼 게 있어서 일주일씩이나 머무르냐고요. 하지만 그런 그들도 다른 나라에 도착하면 모든 게 즐겁고 행복합니다. 잘 사는 나라든, 못 사는 나라든, 미국이든, 아프리카든, 북극이든, 사막이든, 부촌이든, 빈민가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낯선 곳에 도착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지요. 매 순간 새롭고 흥미로운 일들이 가득합니다. 이는 단순히 익숙한 곳에 있느냐, 새로운 공간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행복할 일들은 많습니다. 봄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창틈으로 포근하게 스며드는 햇살들, 길가에서 여유롭게 늘어져 있는 고양이들, 이른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들, 추운 겨울날 자판기에서 꺼내 마시는 300원짜리 율무차,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들, 친구와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농담들, 무심코 들어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감각적인 음악들. 모두가 나에게 냉담한 것만 같아도 마음을 담아 둘러보면 나를 따뜻하게 하는 것들은 늘 주변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삶을 살아가지 않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 벌어지는 일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중환자실에 40대 여성 환자가 입원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병명은 비소세포폐암. 흔히 이야기하는 폐암이었지요. 환자는 흡연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뚜렷한 암 가족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죠. 그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오손도손 살고 있는데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지요.환자는 즉시 항암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구역질이 올라오고 머리카락도 빠지며 갖은 고생은 다 했지만 가족을 생각하며 참았죠. 하지만 결과는 다발 전이. 뭐가 그리 급하였는지 암세포는 순식간에 폐를 떠나 몸 구석구석으로 옮겨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환자의 상태는 점차 악화됐고, 결국 환자는 일반 병동에서 중환자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사용하는 의료기기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인공호흡을 위한 기관 내 튜브, 혈액투석기, 체외순환기, 그리고 피부를 뚫고 있는 주사관들까지. 많은 의료기기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죽음은 이제 정말 손닿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환자도 모를 리는 없었습니다. 환자는 마지막까지 거추장스러운 모습으로 죽기는 싫다고 하였고, 의료진은 그 뜻을 존중하여 산소를 제공하는 콧줄만 제공하기로 하였죠.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근무를 서고 있는 간호사에게 환자가 말했습니다.
“시원한 사이다가 먹고 싶어요...”
간호사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사이다라니. 말도 겨우 내뱉는 저런 몸상태에. 괜히 한 모금 마시게 하였다가 큰일이라도 발생하면 어쩐다 말인가? 몸이 쇠약해진 환자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죠.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면 폐렴이 발생할 수 있고, 폐렴은 중환자들의 중요한 사망 원인 중 하나입니다. 사이다 한 모금을 위해 감수해야 할 부작용의 위험은 너무도 컸죠. 가뜩이나 이미 새벽이었기에 이런 일로 당직의에게 연락을 하는 것도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그것 때문에 밤에 연락했어요?”, “그런 건 알아서 할 수 없어요?”,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선생님이 책임질 거예요?” 새벽에 꿈뻑꿈뻑 졸고 있는 당직의를 깨워 연락하면 짜증 섞인 반응이 돌아오기 일쑤였죠.
그렇지만 모른 채하고 지나가기에는 생사를 오가는 환자의 부탁이 너무 소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 그냥 내가 욕먹고 말자. 간호사는 당직의에게 연락했습니다.
“선생님, 지금 환자분이 사이다 한 모금만 먹고 싶다고 해서요...”
“사이다요?”
“네. 흡인 위험이 있는 거 잘 아는데, 그래도 한 모금만 먹게 해달라고 부탁하네요. 사이다 한 모금만 줘도 될까요?”
“조심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정 그러면 조금만 드려보세요. 대신 선생님이 옆에서 잘 살펴보고요.”
다행히 당직의는 이해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간호사는 빨리 보호자인 남편에게 연락했습니다.
“보호자분이시죠? 지금 환자분이 사이다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요. 혹시 사이다 하나 사오실 수 있겠어요?”
“사이다요? 네, 네! 제가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
그도 밤을 지새우고 있었던 걸까, 남편은 쌩쌩한 목소리로 답합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생겨 기쁜 모양이었죠.
하지만 남편이 사이다를 사러 나가고 얼마 뒤 환자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 불안정한 혈압, 떨어지는 산소포화도 수치.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사이다를 사러 간 남편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했고, 간호사는 얼른 사이다를 작은 컵에 부은 뒤 환자에게 갔습니다.
“환자분, 조금만 정신을 차려보세요. 지금 남편분이 사이다를 사오셨거든요. 혹시 조금이라도 드실 수 있겠어요?”
간호사는 사이다가 든 컵을 환자의 입가로 가져갔습니다. 환자는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그러기엔 너무 힘이 부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리곤 느릿느릿하게 말합니다.
“사이다 냄새... 참 좋다.”
그게 환자의 마지막 말이었고, 환자는 그렇게 눈을 감았습니다.
너무도 허망하게 환자가 떠난 뒤, 남편은 ‘내가 늦게 와 그거 한 모금 먹여서 보내지 못했다’며 오열했고, 간호사는 한동안 본인이 어물쩡거려서 환자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냈습니다. 흔한 그 사이다 한 모금 때문에 말이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다 보면 소중한 것들을 놓치며 살 때가 많습니다. 당시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일 이어지는 강의들과 일 년에도 수십 번이고 치러야 할 평가들.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된다는 게 그토록 고생스러운 일인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된 전쟁터 속에서, 이별과 울음이 가득한 병원 안에서, 저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마주하곤 했습니다. 제게는 너무도 흔하고 당연한 것들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모든 것들이었지요. 언젠가 괜스레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한 날에 차가운 사이다를 벌컥벌컥 마셔보시길 바랍니다. 목구멍을 찌르며 내려가는 탄산 방울들을 느끼며, 익숙한 일상들에 낯선 소중함을 느끼며.
삶은 매순간에 있습니다. 정말로 집중해야 할 경험은 ‘지금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생각, 편한 감각, 불편한 감각, 반가운 감정, 힘든 감정. 나는 그 모든 심리적 사건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큰 존재라는 걸, 내 마음속에는 그 모든 심리적 사건들을 매순간 기꺼이 경험할 수 있는 큰 공간이 있다는 걸, 그리고 매순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걸 기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