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동안의 과정은 모두 이 질문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심리적 괴로움이 단순히 괴로움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괴로움은 더 큰 문제입니다. “나는 왜 이 지경인가”라는 생각, 마음을 흔드는 우울, 불안, 무기력. 이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우리를 괴롭히지요. 괴롭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심리적 괴로움과 싸우는 동안 시계의 시침은 잘도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째각째각. 삶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벌써 이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릴 적 내가 꿈꾸던 모습이 아닙니다.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들던 어릴 적의 나는 이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소박하더라도 창의적인 일들을 해보고 싶었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고, 작지만 남을 돕고 싶었고, 또 무언가에 정신없이 몰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취미도 가지고 싶었고, 변변찮은 숙소에서 자더라도 틈틈이 다양한 곳을 여행하며 세상과 연결되고 싶었습니다. 벚꽃이 만개한 강가를 거닐며 봄을 즐겨보고 싶기도 했고, 눈이 쏟아지는 날 작은 눈사람이라도 만들며 겨울을 만끽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뒷전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심리적 괴로움 그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잃어버린 삶이 더 큰 괴로움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강력한 악순환 고리가 있습니다. 심리적 괴로움들을 없애는 데 더 초점을 맞출수록, 삶 자체를 놓친 것으로 인한 괴로움은 더 커져만 간다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앞서 이야기 나눈 것처럼 심리적 괴로움을 없애려는 시도는 매번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회피할수록 강해질 뿐입니다. 결국 심리적 괴로움이 더 커지기도 하지요. 마음은 조급해져만 갑니다. 심리적 괴로움은 나날이 더 커집니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든 통제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습니다. 그럴수록 삶 자체에 더 집중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던 삶은 아득해져만 갑니다. 무엇이라도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통제하고, 제거하고, 대체하려고 해봅니다. 회피할수록 강해질 뿐이네요. 결국 상황은 갈수록 더 나빠지기만 합니다.
이제는 선택할 시간입니다. 내가 삶에서 정말 중요시하던 것, 내가 영위하고 싶은 삶의 형태, 즉, 나의 ‘가치’에 맞는 선택을 할 시간입니다. 가치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들과 거리를 두었을 때, 내가 초점을 맞출 곳은 내가 정말로 중시하는 것, 즉, 나의 가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치는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가치와 관련하여서는 수용전념치료의 창시자 Steven C. Hayes의 정의가 가장 실용적이라 생각합니다. “가치는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입니다.” 누가 나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가치가 고려되었을 때 디스턴싱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디스턴싱,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에 그대로 반응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기꺼이 경험하며, 나의 가치에 맞는 생각에 더 반응하기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그동안 디스턴싱을 연습하다 보면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었을 겁니다.
“좋아... 불안감이 예전처럼 나를 압도하지 않아. 생각의 강에 앉아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들을 지켜볼 수도 있어. 기꺼이 경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건 심리적 사건이니까. 근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이때 가치는 매순간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가치에 집중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역이용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생각은 자동적입니다. 상징적인 효과를 지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 중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중요시하고 가슴 뛰는 것들도 있습니다. 가치입니다. 가치가 명료해졌다면 디스턴싱을 통해 마련한 공간감 속에서 나에게 더 도움이 되고 내가 원했던 팝콘들을 선택해 나가면 됩니다. 한편 가치는 삶 자체에 무엇을 더 채워 넣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디스턴싱을 연습하기로 결심한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이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방향성을 상실한 것이지요. 이때 가치를 되새기고 방향을 잡는 일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방향이 정해졌다면 매순간 그에 따른 선택들을 해 나가면 될 뿐입니다.
가치가 그토록 중요하고 그동안의 과정이 모두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 중요한 이야기를 왜 지금에서야 시작하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가치를 이야기하고 가치에 따른 행동들을 해 나가도록 연습하면 되지 않냐고요. 합당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이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겁니다. 가치를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디스턴싱에서 그간 진행해왔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에 그대로 반응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기꺼이 경험하는 일말이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가치는 또 하나의 문제 해결적 본능이 되고, 또 하나의 회피가 되고, 또 하나의 텅 빈 마음이 되며, 또 하나의 부정확하고, 편향적이며, 과도한 책임감을 지우는 생각이 되며, ‘기꺼이 경험하기’가 아닌 또 하나의 ‘버티기’가 됩니다.
그동안의 연습이 어떻게 가치와 연결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나는 ‘삶’이라고 하는 버스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다 보면 다양한 승객이 탑승하게 됩니다. 그중에는 내가 정말로 원치 않는 승객들도 있습니다. 이 승객들은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버스 뒷편에 앉아 소리를 지릅니다. 때론 난동을 피우기도 합니다. 가끔씩은 버스를 이 방향으로 운전하라고 훈수를 두기도 합니다. 그곳으로 운전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겠다고 협박을 하면서 말이죠. 이 승객들은 결코 버스에서 내릴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 당신에게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운전 자체를 멈춰버리는 것이지요. 몇몇 사람들은 삶 자체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버스 승객과 싸울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버스에서 내리지 않겠지만 버스를 운전하면서, 때론 버스를 잠시 정차하고 승객들과 끝없는 싸움을 이어 나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그들을 통제하거나, 없애거나, 더 나은 승객으로 대체하려고 하면서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반복하며 삶에서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하곤 합니다. 혹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방법도 있습니다. 삶이야 어떻게 흘러가든 최대한 그들의 기분에 맞추는 것이지요. 또 많은 사람들이 실제 이런 삶을 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안에서 홀로 삶을 보내기도 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죠.
하지만 또 다른 선택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고려해보지 못했던 선택이지요. 불편한 승객들을 내리게 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버스를 운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승객들이 조용해지진 않습니다. 불편한 승객들은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이야기도 오히려 귀 기울여 들어봅니다. 기꺼이 경험합니다. 그들은 아주 자동적으로 여러 이야기들을 내뱉고, 그 이야기가 때론 상징적인 효과를 발휘하여 나를 괴롭게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이야기가 절대적인 사실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합니다. 결국 그들도 하나의 승객일 뿐임을, 나는 승객도 아니고, 버스도 아니고, 그것을 운전하는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곳을 향해 버스를 운전합니다. 불편한 승객들이 다 내린 후 언젠가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내가 원하는 곳을 향해 핸들을 돌립니다. 가치는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입니다.
승객과 나 사이의 관계, 승객이 내뱉는 말의 의미를 잘 다루지 않고 무작정 버스를 원하는 방향으로 운전하라고 하면 스트레스와 좌절감만 더 커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버스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를 잘 알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이런 게 좋았어요”, “저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저는 이런 일들을 보면 가슴이 뛰어요.” 훌륭합니다.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반면, 나의 가치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가치를 명료화하기 위한 다양한 작업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일상 속 긍정적인 감정이 들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하고, 분리하며(Isolation), 정확히 내가 어떤 부분에서 행복감을 느끼는지 파악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기록이 쌓여감에 따라 조금씩 그 윤곽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온전히 디스턴싱된 상태, 즉, 생각, 감정 등을 하나의 심리적 사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자연스럽게 분명해진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우울, 불안, 회의, 자기 의심 등이 걷히면 청명한 하늘엔 무엇이 있는지 더 잘 보이기 마련입니다. 강에 앉아 흘러가는 나뭇잎을 바라볼 수 있으면 강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도 더 잘 보이기 마련입니다. 가치를 명료하게 하기 위한 유도 명상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 중 어릴 적 설레고 행복했던 경험, 성취감을 느꼈던 경험, 나의 특정한 행동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뿌듯했던 경험 등을 살펴보며,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기꺼이 경험해보는 방식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나’의 모습, ‘삶’의 모습을 찾기도 합니다.
단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를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가치는 한 사람에게서조차 다양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상충되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저는 부단한 노력으로 사회를 진보시키는 일에 큰 가치를 느끼지만, 반대로 적더라도 단단한 관계로 맺어진 주변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헌신하고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건네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전자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처럼 보이고, 후자는 가족에 집중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요. 문제될 건 없습니다. 각각의 가치는 제가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 상태에서 선택한 삶의 방향이라는 점에서 완벽합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각각의 가치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그것이 제 삶에 통합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지요. 조정이 필요한 건 가치가 아니라 매순간에서 저의 행동입니다.
또한, 가치는 삶의 여정에서 충분히 변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메뚜기가 잔디밭을 뛰어다니듯 변덕스러워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가치는 충분히 변할 수 있습니다. 악덕 사장처럼 굴다가 삶에서 중요한 일을 경험한 후 사회에 공헌하는 데에 헌신하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또한 훌륭한 변화입니다. 그러니 단 하나의 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문제 해결적 마음의 본능이라는 점을 알아차리시길 바랍니다. 그저 떠오르는 가치를 알아차리고 그때부터 삶의 방향을 그에 맞게 조정하면 됩니다. 아직 명확하지 않다면 디스턴싱을 지속하며 위에서 소개한 방법들을 꾸준히 실천하면 됩니다. 조급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분명 나의 마음에 더 명확한 팝콘이 떠오를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까지 가치에 집중해야 할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이 진짜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울, 불안, 회의, 분노, 슬픔, 떨치고 싶은 기억과 싸우는 것이 삶의 주된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보류했던 선택을 해나갈 시간입니다. 설령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지언정 괴롭진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기꺼이 경험하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삶의 다양한 풍요로운 모습들을 마주할 수 있고, 그 굴곡 자체가 삶의 중요한 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끊임없이 팝콘을 만들어내겠지요. 근거 부족, 책임 과다, 부정 편향에 빠진 생각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할 것이고, 평가, 반추, 개념화에 빠진 생각들은 매 순간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하지만 매순간 내가 가치를 향한 방향으로 서 있다면, 내가 그것을 선택하기로 한다면, 그 즉시 마음과의 지난한 싸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인 미끄러운 얼음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그 맥락은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고통이라는 마찰력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걷고 싶습니다.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싶습니다. 따라서 고통이라는 마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괴롭진 않을 수 있습니다. 거친 땅으로 돌아갑시다. 기꺼이 경험하며 가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 그 자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고개를 돌려보시길 바랍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피곤하게 일하고 있는 종업원들, 책장에 박혀 있던 오래된 책들. 나의 가치가 닿을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