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는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유명한 개념이 있다. 흔히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쉽게 표현하자면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 믿음에 들어맞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고, 결국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현실에서 믿음에 가까운 결과를 낳게 되는 원리다.
이러한 자기실현적 예언은 대인관계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새 직장으로 이직 후, 모두가 나를 싫어할 것 같다는 마음을 품고 첫 출근을 맞이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적극적으로 대화하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망설일 것이다. 그러면 직장 동료 역시 나를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고, 원래의 믿음처럼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거절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될지 모른다. 결국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강화되고, 믿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Nature Reviews Psychology의 2025년 1월호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부정적인 사회적 기대는 우울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바로 ‘우울증과 사회적 기대(Social expectations in depression)’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부정적인 사회적 기대가 우울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왜 쉽게 바뀌지 않는지, 그리고 치료를 통해 이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정리해보자.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을 대하고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기대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 거야,” “나는 절대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없어”와 같은 믿음은 대인관계에 임하는 자세와 사회적 상호작용을 해석하는 방식을 왜곡함으로써 결국 우울 증상을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앞선 예시처럼, 거절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대인관계에서 눈맞춤을 피하고, 대화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과도하게 확인받으려고 하는 행동을 유발한다. 이러한 행동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거리감을 느끼게 하고, 결국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 거야”라는 믿음에 부합하는 결과가 연출된다. 이는 기분 저하, 부정적인 자아상 등을 악화시키고, 악화된 우울 증상은 또다시 부정적인 사회적 기대를 강화한다. 이러한 악순환이 굳어지면 대인관계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믿음을 쉽사리 수정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사회적 기대는 왜 쉽게 바뀌지 않을까? 연구진은 우울증에서 흔히 관찰되는 ‘부정 편향(negativity bias)’을 주된 이유로 꼽았다. 우울한 사람은 대인관계 상황에서 긍정적인 피드백보다 부정적인 단서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애매하거나 중립적인 상황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거절당했던 경험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곱씹기도 한다. 특히 어린 시절 가정에서 방임 또는 학대에 노출되었거나 학교에서 따돌림을 경험한 경우, 부정적인 사회적 기대를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현상은 다수의 뇌영상 연구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우울증 환자는 뇌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처리하는 보상 회로의 활성화가 감소한 반면, 사회적 비판 또는 거절을 처리하는 영역은 높은 활성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울증 환자의 부정적인 사회적 기대를 바꾸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연구진은 ‘기대 위반 이론(expectation violation)’이라는 특정 심리 기법을 활용하면 이 악순환을 깨뜨릴 수 있다고 한다. 우울증 환자는 긍정적인 사회적 경험을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경험을 단순한 예외로 넘길 게 아니라, 부정적인 사회적 기대를 수정하는 기회로 적극 받아들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기대를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 “직장 동료가 나랑 말하고 싶어하지 않아”라는 믿음을 예로 들 수 있다. 다음 단계는 그 믿음을 시험해볼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직장 동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거나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만약 직장 동료가 인사를 잘 받아주는 등의 긍정적인 경험을 했다면, 이를 있는 그대로 돌아보면서 부정적인 믿음을 깨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우울증은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색안경을 벗으면 처음에는 그 세상이 어색하고 낯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한다면, 결국 색안경 뒤편에 숨어있던 빛과 색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Kirchner L, Kube T, Berg M, et al. Social expectations in depression. Nature Reviews Psychology. Published online December 5, 2024. doi:https://doi.org/10.1038/s44159-024-00386-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