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기 트라우마는 성인기에 다양한 정신건강 문제의 위험을 높인다. 아동기 트라우마는 직접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자존감, 감정조절 문제 등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을 유발하기도 한다.
분노 또한 아동기 트라우마와 연관이 깊다. 분노는 적절한 상황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과하거나 조절되지 않는 경우에는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직장, 친구 관계 등에서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2023년 7월 정신의학 학술지 Acta Psychiatrica Scandinavica에 발표된 한 연구는 아동기 트라우마와 분노 사이의 연관성을 잘 다루고 있다. ‘우울증 및 불안 장애가 있는 성인과 없는 성인에서 아동기 트라우마가 분노에 미치는 영향(Childhood trauma and anger in adults with and without depressive and anxiety disorders)’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연구는 아동기 트라우마가 성인기 분노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고자 했다. 연구에는 18-65세 사이의 네덜란드 성인 2,271명이 참여했다. 연구진은 아동기 트라우마와 분노 간의 연관성이 정신질환의 유무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우울증 또는 불안장애로 진단되었거나 두 질환 모두 앓고 있는 환자군, 그리고 건강한 대조군을 연구에 모두 포함시켰다.
연구는 4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시작 시점에는 아동기 트라우마 인터부(Childhood Trauma Interview)를 통해 어린 시절 경험한 트라우마의 종류와 빈도를 확인했다. 이후 4년 뒤 종료 시점에 분노를 측정할 수 있는 다양한 자기 보고식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이때 분노란, 단순한 화가 나는 감정뿐만 아니라 분노 발작의 빈도와 경계성 및 반사회적 성격 특성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을 뜻한다.
연구 결과, 아동기 트라우마와 분노의 다양한 형태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연관성이 나타났다. 아동기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성인기에 분노 발작을 경험하거나 경계선 및 반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될 위험이 높았던 것이다. 또한 아동기 트라우마의 빈도와 심각도가 높을수록 분노가 증가하고 성격 문제의 유병률이 높아지는 정비례 관계도 관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아동기 트라우마의 주제가 정서적 방임, 심리적 학대 및 신체적 학대일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더 나아가, 아동기 트라우마는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유무와 전혀 무관하게’ 분노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정신질환이 있든 없든, 아동기 트라우마는 분노의 위험을 높이는 것이다. 다만, 그 연관성이 우울증 또는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경계선 성격장애에 대한 영향이 두드러졌다. 우울 또는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에서 아동기 트라우마가 경계성 성격 특성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더욱 높다는 것이다. 겅계선 성격 장애는 깊은 공허감을 특징으로 하는 질환으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안정하고 충동적, 극단적인 행동 문제를 흔히 동반한다.
본 연구를 통해 아동기 트라우마가 성인기 분노의 강력한 위험 요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러한 위험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있는 경우 더욱 높아진다. 따라서 우울, 불안 등 다양한 정신건강 문제가 중첩되어 나타난 경우라면,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 정신건강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은지 충분히 탐색할 필요가 있다.
비록 오래 전 일어났던 일이라도 간과하고 지냈던 트라우마가 현재 겪고 있는 분노 또는 대인관계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de Bles NJ, Pütz LEH, Rius Ottenheim N, et al. Childhood trauma and anger in adults with and without depressive and anxiety disorders. Acta Psychiatr Scand. 2023;148(3):288-301. doi:10.1111/acps.13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