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 현장에서 다양한 환자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공허하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공허함(emptiness; feeling empty)은 경계선 성격장애의 핵심 증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울증 등 다양한 정신건강 문제의 일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공허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비다’ 또는 ‘실속이 없이 헛되다’라는 설명이 나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허함’이라는 단어를 통해 정확히 어떤 감정이나 상태를 전달하려고 하는 걸까?
공허함은 특정 진단과 관계없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다. 그러나 공허함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2024년 8월, 임상심리학 학술지 Journal of Clinical Psychology에 공허함이라는 개념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는 연구가 게재되었다. ‘진단을 초월하는 공허함의 경험에 대한 귀납적 접근법(A General Inductive Approach to Characterize Transdiagnostic Experiences of Emptiness)’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함께 살펴보자.
본 연구는 미국에 위치한 대학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낮병동에서 치료받는 성인 환자 150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참가자는 지속적인 공허함을 경험하고 있다고 응답했던바 있다. 연구진은 참가자를 대상으로 구조화된 임상 면담을 실시해 참가자가 공허함의 경험을 직접 자신의 말로 풀어 설명하도록 지시했다. 다음으로 두 명의 평가자가 면담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공허함의 핵심 주제를 도출했다.
그렇다면 지속적인 공허함을 경험하는 환자들에게 공허함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참가자의 약 26%가 공허함을 ‘삶의 무의미함’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삶의 어떠한 의미나 목표, 성취감이 결여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면담 중 “나는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시간만 허비하는 느낌이다”라는 뉘앙스의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다음으로 자주 등장한 핵심 주제는 16%를 차지한 대인관계 단절이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롭다”라고 하는 등 주변에 사람이 있음에도 깊이 연결되지 못한 느낌이 들거나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데에서 공허함이 든다는 응답이 있었다.
참가자의 15.3%가 “감정이 아예 사라진 느낌이 든다” 등 어떠한 감정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보고했다. 연구진은 마비는 쾌감 상실(anhedonia)과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쾌감 상실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만, 환자들이 보고하는 마비는 감정 자체가 차단된 느낌이라는 것이다.
참가자의 11.3%는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끼며, 공허함을 자신의 실패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하는 건 항상 부족하다”라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며 공허함을 호소했다.
참가자의 약 10%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확고한 정체성이 없어 자신의 존재가 모호하게 느껴지면서 공허함이 더욱 깊어지는 양상이 관찰되었다.
이외에도 동기 부족(lack of motivation), 절망(hopelessness), 즐거움의 결핍(lack of pleasure), 신체 감각(physical sensation), 그리고 해리(dissociation)가 주된 핵심 주제로 등장했다.
참가자는 제각기 다른 이유로 공허함을 호소하고 있었으며, 자세한 면담을 통해서 다양한 핵심 주제가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특정 증상이나 단어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공허하다,’ ‘우울하다,’ ‘불안하다’라는 말을 할 때 그 단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내 마음은 사소한 것까지 세세하게 표현할수록 해결에 한껏 가까워진다.
Hudson CC, Ferguson I, Fan K, Björgvinsson T, Beard C. A general inductive approach to characterize transdiagnostic experiences of emptiness. J Clin Psychol. 2024;80(8):1726-1735. doi:10.1002/jclp.23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