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가 없어요.”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런 생각이 깊을 때에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또는 행동활성화를 통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왜”라는 질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생각을 바꾸고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걸까? 이 우울하고 지난한 삶을 왜 살아나가야 하는 걸까? 삶이 이토록 의미없는데 대체 왜?
초창기 인지치료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해결책을 제공할 수 없었다. 삶의 목적까지 치료자가 찾아줘야 한다는 말인가. 당시 인지치료는 그저 우울한 감정을 해결하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이 치료의 전부가 아님을 잘 이해하고 있다.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증상이다. 또 우울증이 심한 누군가는 삶의 방향성을 보란듯이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 문제는 결코 우울증과 떼어넣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현대 인지치료는 이 문제를 ‘가치’라는 개념을 활용해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 가치는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이다. 이 문장을 하나씩 이해해보자.
가치는 순간 순간이 무엇을 향해 있는가와 관련된다. 즉, 내가 어떠한 방향을 향해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달성할 수 있는 어떤 목표 같은 것이 아니다. 가령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가치 중 하나라고 해보자. 만약 내가 어느 누군가를 수개월간 사랑했다고 해서, 나 자신의 가치를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집을 짓는 것에는 완결이 있고 학위를 받는 것에도 끝이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는 마침표가 없다. 가치는 그저 삶에서 어떤 것을 중시하여 그 방향으로 나아가겠는지에 대한 선택이다.
이성에 근거한 판단과 선택은 같은 것이 아니다. 가치는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선택한 문제일 뿐이다. 선택은 이성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며, 이성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그것을 원하고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는 왜 중요한 걸까?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으로서의 가치는 삶을 지지해주는 하나의 중심점이 되기 때문이다. 가치는 내가 우울한 순간에도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해주며, 무기력에 빠진 순간에도 행동해야 할 원동력을 제공해준다.
하나의 재미난 예시가 있다. 근현대 철학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흔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이 거론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집에 브람스라는 음악가를 초대해 연주를 시킬 정도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집안에는 강력한 우울증 병력이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네 형제 중 셋은 다 자살해버렸다. 비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로 평생을 자살사고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는 그만 삶을 마감하라고 속삭이는 내면의 목소리를 일평생 듣고 지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을 했을까?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생각의 개별 요소에 반응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전념해야 할 가치를 정했다.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철학이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차세계대전에 발생해 참전한 상황 속에서도 참호속에서 글을 쓰며 철학을 했다. 눈앞에 포탄이 떨어져도 그는 공책과 팬을 놓치 않았다. 그의 삶에선 철학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곤 이탈리아 포로수용소에서 철학계를 평정할 역작을 완성한다. 포로인 상태로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후에 생을 마감할 때 유언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람들에게 내 생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해주세요.” 이상하지 않은가? 일평생을 자살사고에 시달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생각은 나 자신이 아님을 잘 이해하고,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시 삶을 나의 가치에 맞는 방향으로 되돌려 그에 전념한다는 설명을 이해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다소 어색한 유언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인지치료를 진행하며 ‘생각과 거리두기’라는 표현을 설명하면 흔히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거예요?” 반드시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내 마음속에 특정한 방향으로 행동해야겠다는 충동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시점에서 생각과 행동을 나 자신의 가치에 맞는 방향으로 재정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에 맞는 선택들을 해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온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