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하필 왜 나에게?

우울증을 앓게 된 사람들은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한다. “선생님, 왜 제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다들 잘 사는데 왜 저만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걸까요? 제가 나약해서 그런 걸까요?” 과연 그럴까?

우선 ‘내가 나약해서’ 그런 것 같진 않다. 보통 우울증을 앓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든 깊은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겠구나’ 싶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버틸 만한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나약하여 문제가 발생한 경우는 드물다. 물론 사람에 따라 감수성이 다르고 자극을 받아들이는 예민함이 다르겠으나, 그럼에도 우리가 임상적인 수준의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도래한 데에는 대부분 그럴듯한 연유가 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를 ‘타당하다(Validation)’고 말하기도 한다. 누구든 그런 상황에서는 충분히 우울증을 겪을 수 있단 뜻이다. 우울증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우선 이를 잘 인지해야 한다.

다음으로 다들 잘 사는 것 같지도 않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국내만 하더라도 20대 이상 성인 중 우울, 불안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약 1,100만 명에 달한다. 그 중에서 임상적으로 질환으로 규정될 정도의 문제를 가진 사람은 약 330만 명에 달한다. 미국인의 약 15-20% 정도는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우울 문제를 마주하고 있지만, 왜 우리는 ‘나만 이럴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간단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에서도 힘들고 우울한 이야기를 쉽게 하진 않는다. 괜히 민폐를 끼치는 것 같고,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더욱 그렇다. 미국 사람들의 20% 정도는 깊은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항우울제를 복용하지만, 미디어는 항상 밝고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모습만 강조한다. 우울한 사람을 모델로 내세우는 광고를 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결국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나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나만 이럴까’라는 생각을 조금 더 의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울증이 있는 경우에는 뇌에 일종의 색안경이 씌워진다. 색안경은 우울증을 지지하는 정보들은 더 잘 받아들이고, 반박하는 정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나, 타인, 세상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세상과의 단절’이다. 우울증을 앓게 된 사람들은 자신이 하루종일 우울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다른 사람과 달리 자신은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갈수록 나빠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색안경이 작동하여 결국 ‘나만 문제가 있어. 결국 회복될 수 없을 거야. 사람들은 행복해보이네. 난 고립되고 말겠지.’와 같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만 이럴까’라는 생각조차 우울증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우울증, 왜 우리에게?” 대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겪고, 다 동일하게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걸까? 한 가지 사고실험을 해보자. 짚신벌레는 우울을 느낄까? 아마 아닌 것 같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그럴 것 같다. 개미는 어떨까? 개미는 우울함이라는 걸 느낄까? 짚신벌레 경우보다는 조금 어렵지만 그래도 아닌 것 같다. 개미가 우울감에 빠져 무기력하게 있는 모습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강아지는 어떨까? 어쩌면 강아지는 우울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통계적으로 보면 강아지조차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수준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우울증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강아지들이 감정을 느끼고 때론 우울해한다는 것만은 제법 사실처럼 느껴진다. 원숭이는 어떤가? 이쯤되면 이제 그들도 우울을 느끼고, 심지어는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생명체의 '자아'가 확실해질수록, 우울을 느낄 확률이 높아보인다.

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생명체의 ‘자아’가 확실해질수록, 우리는 그 생명체가 우울을 느낀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확신할 수 있다. 즉, 어떤 생명체가 스스로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다고 믿을수록 그 생명체는 우울을 느낄 확률이 높아보인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생명체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속에 떠올린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믿고 따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니까.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아주 강력한 상징적 효과를 지닌다. 레몬을 씹어먹는 장면을 상상하면 곧바로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미래에 대한 걱정은 지금 이 순간에 실존하는 불안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는 지금 이 순간에 실존하는 우울로 실재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도 그렇게 자유롭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어떨까?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들이 모두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또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생각들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게 아니라면? 어쩌면 지금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강력하게 우울증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들이라면 어떨까? 실제 자신이 하루종일 우울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활동 기록을 진행해 보면 하루 중 매우 큰 기분 변화가 있고, 때로는 제법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실험을 해보면 사람들이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일 때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을 의심해야 한다.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모두 믿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둔 상태. 일단 그 태도가 만들어지면 우리는 우울증의 지독한 색안경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누군가는 이를 개방성(openness),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유연성(flexibility)이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사실은 생각 자체에 대해 열린 태도를 지닐 수 있을 때, 우울증을 극복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을 기록하고, 관찰하고, 생각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가자.